여백
이 종 욱
오십여 년의 삶 속에서 나의 노트는 항상 검은 글씨로 채워져 있다. 한창 읽다 보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남보다 뒤쳐졌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조금의 틈도 남기지 않으려는 치열했던 생활이었다. 2년여 기간 닭장 같은 독서실에서 고독을 자초하고 책과 시름하였던 날도 시험을 치름으로 틈이 생겼다. 대형 식당을 8년이나 쉼 없이 운영하며 삶을 담보 잡혔던 아내도 식당을 팔았다. 늘 일로 살아왔던 사람에게 꼭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마음을 공허하게 한다.
지도를 펴들었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손가락이 닿은 호주로 달랑 배낭하나 메고 떠났다. 옷 두세 벌, 라면 두어 개 집어넣었다. 먼 길 가자니 배낭 무게는 최대한 줄여야 했다. 함께 동고동락을 하기로 이십여 년 전에 맹세한 에스터와 함께 무엇을 줄여야 하는지 고민을 거듭한 후 짐을 꾸렸으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인천 공항으로 향하였다.
아내를 에스터라 이름 한 것은 유대인으로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자국민을 학살로부터 구해낸 위대한 여성의 이름을 따서 마음속으로 붙이게 된 것이다.
그곳이 어떠한 곳이든 처음으로 가 보는 곳은 항상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다가오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훨씬 컸으므로 거침없이 떠나는 것이다.
휴대폰이 로밍 되어 있었지만, 전화는 뜸한 편이어서 모든 것이 단절 되었다. 분주하던 생각들은 한국 땅에 다 남았는지, 가끔 바람이 얼굴을 스칠 뿐 파도가 잠든 해변처럼 적막하였다. 무념의 공간인 백지를 바라보니 왠지 삶의 의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여, 귀국하여 할 새로운 사업을 서로 이야기 하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요트가 정박한 주택이 나래비 선 브리즈번의 강, 서핑 천국 골드코스트, 세계의 히피들이 자유를 뽐내는 바이런베이의 해변, 시드니의 하버브리지와 아바의 공연을 TV로 보았던 오페라하우스, 바둑판처럼 정비된 계획도시 캔버라, 무료 트램이 쉼 없이 도시를 순회하는 멜버른, 그레이트오션의 멋진 해안도로, 에들레이드의 넓고 넓은 포도밭을 걷고 또 걸었다.
워킹홀리데이로 온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거리에서나 식당에서 마주쳤다. 일생의 경험으로 할 만한 일이다. 심지어는 거리에서 마술공연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한국 청년들도 있었다. 이국이란 두려움 없이 젊은 시절을 열정으로 보내는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해외에서 이렇게 일을 한다거나 같이 배낭여행을 하는 것은 같이 참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캔버라의 박물관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교통비가 비산 곳이라 버스를 타고 다녀야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쉽지 않은 버스타기가 이국땅에서 쉬이 될 리 없으니, 다리 발품을 예상 밖으로 많이 팔아야 하게도 되었다. 곳곳의 입장료를 물고라도 보아야 한다거나 돈을 아껴야 한다며 의견 차이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니, 에스터는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원망이 절로 나올 듯 울음이 터질듯 표정을 지을 때도 있고, 돈 걱정 없이 일방적으로 내주장을 강요할 때도 돈과 욕망을 적절이 고려하여 묘하게 타협하며 서로 참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에서 졸고 있는 코알라는 야간 주차장에서 밤 12시 버스를 기다리며 추위에 떨기도 했었다.
결코 넉넉해서 떠난 여행이 아니다. 차가운 바람 속에 고독하게 선 여행자를 상상하는가. 빚을 내어서라도 떠나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앞뒤 재지 않고 비행기를 탔다. 은빛 들꽃에 두런두런 피어난 해변에 오두막처럼 나직이 자리한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시원함과 멜버른을 떠나 에들레이드로 가는 도중에 들린 황량한 들판의 휴게실 앞에서 남극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볼을 때리는 것은 아무데서나 느낄 수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떠났던 여행의 막바지에 해변에 스며드는 땅거미를 타고 찾아온 1%의 두려움이 발걸음을 주춤하게 한다.
두렵다는 생각은 점하나에서 큰 바위가 되어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한다.
1등이라거나 상위 1%이라거나 목표 지향적인 삶은 오히려 두려움의 씨앗이 되어 자신감을 떨어뜨린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며 사는 생활의 변화를 주어야 복잡다난한 사회를 당당히 살 수 있으리라.
직장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 몸 하나 누일 데 없는 사람의 손을 싫다 않고 잡아주었고, 빈손으로 시작한 삶이 주는 무게로 무릎마저 시원치 않게 된 사람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인생하반기를 향하여 귀국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
하늘을 내려 보았다. 지구는 보이지 않고 아련한 여백이 펼쳐 있었다. 저 공간에 무엇을 그려야 할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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