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럼 저녁 미닫이 문을 밀고 나오니 긴 골목길에는 좌판이 나래비 써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채소 몇 포기 앞에두고 지나는 사람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다. 보슬비 내리는 밤이지만 시장은 질퍽하지 않았다. 필로티 구조의 지붕이 흙탕물이 튈까 시장길을 바지를 접어 올리고 걷던 그 때 풍경을 바꿔 놓았다.
시장가운데 세갈래 길에서 돌아 걸어 갔다. 작은 골목에는 시장사람들의 삶이 들어 있었다. 밥을 짓고 있고 아이들이 단 칸방에서 옹기 종기 살았던 판자집이 그리워 골목골목을 들여다 보았지만 거의 빈 방이 되어 있었다. 요즘 경기가 어렵지만 단칸방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니 강산이 두어번 변하면서 우리 삶이 상전벽해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2층 다락방에 올라가 고개를 구부리고 회를 먹던 사구려 식당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시장길 끝날 즈음에 있던 옛 친구의 방앞에 서서 경건하게 바라보았다. 동사무소에 근무하던 친구의 방이다. 공무원 생활을 접고 신문사 지국장을 맡았다가 어려움에 처해 늦은 밤 한 몸 의탁하려 찾았던 방이다. 이 방의 문을 쉬이 두드리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방을 바라보면, 가끔 창문을 열고 스스럼 없이 들어 오라고 하던 쑥스러웠던 방이다.
사람이 생을 살면서 누군가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없는 일이다. 산이 높은 만큼 골이 깊다고 조그마한 성취앞에는 이런 바닥의 삶이 찾아 들었다.
한 가닥 자존심이 무너질까 가식적인 웃음과 허풍을 늘어 놓을 때마다, 동짇날 한송이 꽃을 보듯 진지하게 나의 일을 고민해주고 마음의 한 조각을 꺽지 않았던 친구에게 보답하지 못하고 아직도 허세를 떨고 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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